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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쌍 손녀와 할배무사

by ggrruu9 2025. 5. 2.

장강의 바람이 거세게 부는 어느 봄날, 묵직한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백발에 주름이 가득하지만,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 바로 무림을 뒤흔들었던 전설의 고수, ‘풍백노인’이었다.

오십 년 전, 천하를 피로 물들인 무림대전의 중심에 섰던 그였지만, 지금은 산속에서 조용히 은거하며 지냈다. 그렇게 세상을 잊고 살던 그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지존맹주가 된… 내 손녀라고?”

마을로 내려간 제자가 전해온 소식이었다. 손녀 ‘풍하연’이 불과 열여덟 나이에 무림지존으로 등극했다는 것이다. 놀란 풍백노인은 곧바로 짐을 꾸려 그녀가 있다는 무림맹으로 향했다.

무림맹 본관 정문 앞,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검을 허리에 찬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고요했지만, 그 속엔 분명히 타오르는 불꽃이 있었다.

“내가… 무림맹주라고?”

그녀도 혼란스러웠다. 언제부턴가 검을 잡았고, 싸움을 배웠고, 상대를 이기기 시작했을 뿐인데, 어느새 모두가 그녀를 ‘지존’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수백 명의 문도들이 웅성이는 가운데, 한 노인이 성큼성큼 정문을 지나왔다. 고작 지팡이 하나에 의지했지만,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가볍게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연아.”

“할아버지…?”

풍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 안겼다. 따뜻하지만 단단한 그 품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검술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기술은 마음을 따라야 한다.”

풍백노인은 밤마다 손녀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이미 천하를 손에 쥔 손녀였지만, 풍백노인은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의 불안과 공허를 꿰뚫고 있었다.

“난 너무 빨리 강해졌어. 사람들이 날 존경하지만, 난…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그녀의 고백에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배우면 되지 않느냐. 천하무공이란,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란다.”

며칠 후, 무림맹을 침범한 흑영문 무리가 본관을 포위했다. 수백의 병력, 흑갑에 붉은 눈동자. 모두가 겁에 질렸지만, 단 두 사람은 달랐다.

“하연아, 네가 앞장서거라. 난 뒤를 맡지.”

풍하연은 말없이 검을 뽑았다. 은빛 검신에 달빛이 반사되었다. 그리고 풍백노인은 지팡이를 옆으로 눕히자, 그것이 천하제일검 ‘청풍’임이 드러났다.

그날 밤, 천하무쌍의 손녀와 할배무사는 단 두 사람으로 흑영문을 무찔렀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적들 사이, 서로 등을 맞댄 두 사람은 말없이 웃었다.

이후로도 풍하연은 풍백노인과 함께 무림을 떠돌며 사람들을 돕고, 스스로를 단련했다. 전설은 다시 쓰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은 이렇게 불렀다.

“천하무쌍의 할배무사, 그리고 지존 손녀.”